기린의 기억 by saltyJiN

종종 블로그에서도 언급 해 왔듯이 저는 일본맥주, 그 중에서도 기린의 팬입니다. 사실 일본 생맥주는 어디 할거없이 대체로 보증된 맛을 보여줍니다만
제가 유난히 기린을 외치는건 개인적인 사사로운 기억 때문이 아닐까 싶네요. 일본 체류 2년째이던가, 주류이면서도 알콜을 느끼기 어려운,
단맛이 매력적인 추하이류에서 헤어나오지 못하고 있을 무렵. 허나 다른 한 편으로는 나도 추하이를 졸업하고 친구들처럼 맥주의 맛을 느껴보고 싶다는 욕심도 있었지요.
하루는 저녁이 되어 출출해져 집앞의 라멘집을 찾았습니다. 그리고 일본인들이 흔히 주문하는 교자+생맥주를 시켰지요.
배가 고팠던 탓일지도 모르겠지만 전 그 때 태어나서 처음으로 맥주의 고소함을 느낍니다. 그리고 그건 다들 예상하듯 '기린'이었죠.

그 때 그 기억이 너무나 선명했던 나머지 전 이후로 기린 팬을 자청합니다. 사실 에비스도 아사히도 삿포로도 산토리도 생으로 마시면
너나할거 없이 다들 맛있습니다. 그렇지만 시작이 기린이었기에, 그 인상이 강하게 남았기에 줄곧 기린을 찾았고 제 입을 기린化 시켜갔습니다.

그러다 이곳 캐나다에 오게 되었고 일년 반 동안 기린 생맥주는 접하지 못하게 됩니다. 여기라고 기린 맥주가 없는 건 아니에요.
미국 공장에서 만드는 기린 이치방 시보리(병)가 들어옵니다. 그런데 이건 마시면 되려 생맥주가 고파지니 감질만 날 뿐, 마시지 않게 되더군요.

얼마 전 일본에 한달 간 머물렀습니다.
네, 기대에 기대를 품고 기린을 찾았지요. 그런데...
무언가 제 기억과 다릅니다. 제 기억속의 기린은 시원한 목넘김 뒤에 짙은 고소함의 여운을 퍼뜨려 주었는데 이건 접하는 족족 목만 따끔하지 깊은 여운이 없습니다.
입맛은 변한다는데 이거 내 입맛이 변한건지 아니면 내 기억이 잘못된 건지 혼란스러울 뿐 입니다.


사진으로 남긴 것 외에도 수차례 마셔보았으나 기억과는 다른 맛이었습니다. (이쯤되면 제 기억이란 결국 제 자신이 만들어낸 허구가 아닐지 의심마저 듭니다)

그렇게 기억과 현실의 차이에 괴로워하며(?) 한달의 여정은 막바지에 이릅니다.
카고시마에서의 마지막 저녁이었죠. 일본을 떠나기 딱 4일전이군요. 얼마 전 소개했던 카고시마 맛집, 메구미노 오카게.
본디 니혼슈(사케)를 메인으로 하는 소주가 유명한 카고시마에선 찾아보기 힘든 이자카야입니다. 마스터 추천의 니혼슈를 몇잔 마시고
얼큰히 달아오른 제 눈에 맥주 서버가 들어옵니다. 사실 우롱차 잔이 기린이길래 내심 짐작은 했습니다. 때는 12시가 다 되어갔고 가게에는 저희 일행 뿐.
마스터도 슬슬 정리를 시작하셨고 맥주 서버도 이미 청소 끝났다는걸 진작에 눈치 챘지만 시치미 뚝 떼고 생맥주가 어디 건지 여쭤봅니다.

예상대로 였습니다.

이런 기회 두번 다시 오지 않아요. 얼굴에 철판 한장 더 깔고 여쭤봅니다.

"혹시 아직 괜찮다면 생맥 한잔 주실 수 있으세요?"

사람 좋은 마스터, 전혀 개의치 않은 모습으로 서버 셋팅 들어갑니다. 사실 물장사라는게 이미 청소 끝났어도 손님이 원하면 두번 청소 하더라도 나오게 돼있죠.
허나 그건 그거고 어쨋든 정말로 번거롭게 해 드려 죄송하다는 표정을 얼굴에 한 껏 머금고 잔을 받아듭니다.



네. 두말 필요없죠. 최고였습니다.
크리미 하다는 건 바로 저걸 두고 하는 말입니다. 이 한잔으로 전 영화에서나 볼 법한 기억상실증으로 연인을 못알아보는 주인공이 어떤 사건으로 기억을 되찾고
옆의 연인에게 와락 안겨 겁나게 뽀뽀를 하듯 벌컥벌컥 넘겼습니다. 너무 맛있어서 두잔 연거푸 마셨습니다.

마스터에게 자초지정을 설명했죠. 제가 기린 팬인데 이번에 와서 영 기억과 다른 맛에 당혹스러웠다고.
마스터 말씀은 생맥주는 어떻게 관리하느냐에 따라 그 차이가 뚜렷해진다. 가스 조절도 중요한데 잘못하면 거품만 풍성, 탄산만 강조되며 속이 빈 맛이 되기 쉽다고.
또한 생맥주가 담긴 통(이거 명칭이..) 관리도 중요한데 주위를 항시 선선하게 유지해 주는게 관건이라고. 그래서 가급적 주위엔 아무것도
두지 않거나 열을 발산하는 물건을 두지 않아야 한다고. 가게에 따라선 통 자체를 냉장에 넣어두고 사용하는 곳도 있단다.
허나 많은 이자카야에서 이런 것들을 일일이 신경쓸 틈도 없거니와 그렇든 말든 어쨋든 생맥주는 주문이 들어오게 되어 있으니 소홀하게 되는 경우가 많다고.

니혼슈의 프로는 맥주도 프로였습니다.



이집에서의 생맥주는 제 기억에서도 두손가락 안에 꼽힐 기억으로 남아있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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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supersoulfighter : 일본에서 마신 것; 맥주 2009-11-09 12:34:37 #

    ... .5배의 보리 사용.캔도 좋지만 클래식 라거는 병을 잔에 따라마시는 맛이...그러고보니 산토리 병맥주는 처음이었던 것 같은데 이게 제법 좋았다.최근에 올렸던 완벽한 한잔.보리랑 홉. 이것도 기억은 잘...요샌 복원이 대세인가? 1958년 발매된 일본 최초의 캔맥주 '아사히 골드'를 당시의 자료를 바탕으로 재현.이것도 ... more

덧글

  • 키마담 2009/10/31 15:10 # 답글

    아 좋은 글입니다. 기억이 만들어낸 허구의 맛.
    사실 그래서 다시 찾아가 먹었을때는 다른적이 많지요.

    하지만 그 추억에 맛은 그맛과 그시간을 합한 나만의 최고의 맛이 아닐까싶어요. 저도 일본 맥주 중 기린을 제일 좋아하는데 반갑네요^^
  • saltyJiN 2009/11/01 00:50 #

    특히 술의 경우 그날그날의 몸상태와 기분, 분위기 등도 작용을 하니 참 믿을 수 없는(?) 기억을 남기는 경우가 종종 있는 것 같아요.
    아니, 믿을 수 없는 건 아니지요. 그게 그날 제가 느낀 맛이니 그건 그거대로 성립 할 테니까요.

    여튼 마지막에나마 최고의 맛을 느끼고 돌아와 다행이라고 여기고 있답니다.
    게다가 이 글로 기린 팬을 한 분 알게 되니 이 또한 반갑군요.
  • kihyuni80 2009/11/01 11:00 # 답글

    포스팅 중반부 까지는 "도루묵"이 생각나는 글이었는데...
    마지막으로 가니 "미스터 초밥왕"에서 옛맛을 찾고 눈물을 흘리는 등장인물들이 생각나는 글이 되어있군요.

    옛맛이 가져다주는 기쁨을 잘 알기에...그런 경험 하신것...감축드립니다. ㅎㅎ
  • saltyJiN 2009/11/01 11:26 #

    전 눈물은 흘리지 않았지만 정말 입이 벌어지는 경험이었지요.
    공감 해 주시니 감사할 따름입니다. ㅎㅎ

    그런데 '도루묵'이 무슨 뜻인지요...
  • kihyuni80 2009/11/01 15:35 #

    정설이 아닌것으로 알려지긴했지만..."도루묵"이라는 생선의 이름에 대해서 전해지는 얘기가 있습니다.
    옛날에(아마도 조선시대)에 피난가던 왕이 "묵"이라 불리는 생선을 맛보게 되었는데
    피난길에 오랜만에 먹은 생선이라 맛이 너무 좋아서
    "지금부터 이 생선의 이름을 '은어'(로 기억합니다.)라고 하여라..."라고 했었다지요.
    그러다가 환궁 한 이후에 묵에대한 기억이 있어서 다시 그 생선을 맛 보았는데
    영~~ 맛이 아니어서..."도루"묵이라고 하여라....라고 했다는 얘기가 전해집니다.

    실제 생선의 이름과는 거리가 먼...야설이라고 생각하는 이야긴데...글을 읽다보니 생각나더군요. ㅎ
  • saltyJiN 2009/11/02 00:35 #

    술자리에서 써먹을 수 있을법한 이야기군요.
    정설이 아니라는 시점에서 쓸 일은 없을 것 같지만요. ㅎㅎ

    설명 감사드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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