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금 이른 산타클로스 by saltyJiN

흰머리 지긋한 어르신과 아들로 추정되는 50대 전후의 남성 두분 입점.
이 어르신... 作務衣(사무에; 절, 여관, 음식점 등에서 많이 볼 수 있는 쉽게말해 작업복. 개량한복 비슷한 느낌)차림에
짧은 머리, 콧수염, 턱수염까지 흰색인데 이 흰색이 굉장히 아름다운(?) 흰색이다. 아주 부드럽고 뽀송뽀송할 듯 한
그런 흰털. 산신의 느낌. 포스가 장난이 아니다.

이런 옷차림에 연세가 더 있으시고 조금 통통하시며 (후에 듣기를 78세이시라고) 수염 더 있고 작은 눈에 안경.


카운터에 앉으시자 마자 상자에 포장된 술과 자몽 봉지를 건네주신다. 본래는 가게에 개인 술 반입 금지인데 특별한 손님인 듯.
보통은 재떨이에 담배꽁초 3개가 쌓이면 교환을 하는데 마스터가 "꽁초 두개 생기면 바꿔드려." 라는걸 봐도 그렇고.
허나 결국엔 담배 한대 끝날때 마다 재떨이를 바꿔드림. VIP. 가게가 한가해서 다행이었다.
상자의 내용물은 브랜디 중에서도 상급인 꼬냑. 처음 보는 녀석인데 Delamain의 Vesper 라는 녀석. 병에 망사가 쳐진게 예사롭지 않다.

http://www.delamain-cognac.com/


아드님(아마도)과 어르신께서 이 꼬냑에 대해 입에 침이마르도록 칭찬을 하신다. 이정도면 다른 브랜디의 XO 위인
EXTRA 급의 물건이라고. (후에 홈페이지에서 확인결과 이 Vesper는 delamain 꼬냑 중 밑에서 두번째 제품. 35년 숙성)
그렇게 마시기 시작하셔서 마스터에게도 권해주시고 이내 스탭 전원에게도 권해주셔서 함께 마시게 되었다.
가게에 있는 술들은 다 알지 몰라도 (사실 그렇지도 않아요 ㅠ_ㅜ) 그 외의것들은 언제 다 접해보겠냐고.
기회있을때 공부들 하라면서. 근데 이거 근래들어 위스키는 조금 마시기 시작했는데 브랜디는 문외한이라 뭐가 특별난지
잘 모르겠다. 확실히 향은 굉장히 좋았는데 맛은 잘... OTL

마스터와 이런저런 말씀을 나누시다가 스탭들의 이름을 물으신다. ㅇ상이 대답하고 ㅌ상이 대답하고 내차례.
한국에서 왔다 하자 흥미를 보이신다. 이름이 한자로 뭐라고 물으시길래 메모에 적어드렸다. 내 성인 '裵 (배)' 는
일본에 없는 한자이기에 한자이름을 설명할땐 적어 보여드리는게 가장 빠르다.
이름을 보시자 성이 신라에서 나온 성이며 뼈대있는 집안이라는 그런 말씀을 하신듯.
사실 매우 귀를 기울여 집중했음에도 불구하고 어르신 우물우물 말씀하시는 것 때문에 40% 정도밖에 알아듣지 못하고
나머지는 앞뒤 맞춰서 눈치로 알아듣거나 대강 눈치보며 맞장구 쳤다;;
배씨에 대해 제주도 어쩌고 하셨었는데 글쎄. 분성배씨라고 알고있고 (근데 분성이 어딘지 모르겠다.) 이게 나중에
경주배씨가 되었다고 언젠가 아빠한테 들었었는데. 그나저나 기품있고 뼈대있는 집안이라도 그건 다 옛날이야기이지
요샌 별 상관없지않나... 하면서도 그저 감사하다고 인사하며 끄덕끄덕. 나더라 몇대냐고 여쭈어 보시는데
헉. 그러고보니 몇대지. 모르겠다. 내 뿌리에 대해 너무도 무지한 내가 한순간 부끄러워졌다.
그리고 이름을 보시더니 참 좋은 이름이라고, 이름 지어주신 분에게 감사히 생각하라고.
음... 내 이름 누가 지었더라. 부모님인가 외할아버지인가 작명소인가... 이것도 숙제다.

어르신, 한국에 있는 지인, 오사카에의 한국인 지인분 등으로부터 이것저것 보내 받으신다고 한다.
그래서 지금 집에 큰 상자에 든 인삼제품이 있는데 이거 복용법을 몰라서 손을 못대고 계신다고 한다.
설명이 있긴한데 죄다 한국어라고. 마침 잘됐다며 다음에 올때 그걸 가져올테니 설명서 번역을 해달라 하신다.
저야 흔쾌히 OK. 완벽하게 해낼 수 있을지 어떨진 모르겠지만;;

헌데 갑자기 마스터에게 봉투를 달라 하신다. 봉투를 받으시자 이번엔 붓펜을 찾으신다.
급히 스탭이 가까운 편의점에서 붓펜을 사왔다. 곧 봉투에 무언갈 휙휙 쓰시더니 날 오라 하신다.
다음에 인삼 가지고 오면 통역 잘 부탁한다고 하시며 내게 봉투를 내미신다.
?????? 상황파악이 안되는 나는 옆에 서있던 마스터를 쳐다보고 마스터는 받아두라고.
"아... 에? 가 감사합니다." 영문파악이 잘 안됐지만 일단 인사하고 받았다. 얼떨떨...
어르신과 아드님께서 유학생활 힘내라고, 열심히 하라고 덧붙이신다.
사례금을 먼저 받다니... 그나저나 엄청 부담스럽다. 그냥 봐드리는거면 이거 뭐라고 번역해야하나
머리 긁적이며 봐드릴텐데 이렇게 된 이상 완벽하게 봐 드리지 않으면 안된다는 (별도의 사례금 없이도 가능한 데 까지는
봐드릴 생각이지만) 부담이 양 어깨를 짓누른다. 아아아... 의외로 복용법이 간단했으면 좋겠다.
렌지에 돌려 드세요. 라든지. 각종 형태의 인삼제품 복용법을 알아 봐 놓아야 겠다.

후반에는 가져오신 자몽 (캘리포니아산을 직접 배송받으시는 듯) 과 꼬냑을 사용하여 칵테일로 만들어 달라고.
셰이커는 적게 흔들고 브랜디의 맛을 남기고 어쩌고 저쩌고 까다로우시다. 마스터가 재료를 셰이커에 붓고 힘차게,
허나 짧게 흔든다. 가게 내의 시선이 칵테일 글래스에 집중된다. 칵테일이 따라지고 어르신의 평가는 일단 합격.
허나 조금 달았던 듯. 이보다 브랜디가 조금 더 세도 괜찮았을 거라고. 다시 한번 만들어 보라며 하시고
두 잔을 비교하게 하신다. 이내 스탭 전원에게도 직접 두 잔을 마셔보라고 하신다. 그러시며 이게 내 입맛이니
외워두라고 몇번을 당부 하신다. 사실 이 즈음에서 아주 조금 짜증이 났다. 가게 전세놓은 것도 아니고 계속 꼬장꼬장한
말투로 말씀하시니. 까칠하시네~ 했는데 가게 나가실때엔 머리 숙이시며 잘 먹었다고, 소란피워서 미안하다고
또 오시겠다고 해주셔서 기분이 좋아졌다. 개인 술에다가 딱히 술을 주문하신 것도 아니기에 계산이 좀 애매했는데
팁 포함 마스터 만엔, 스탭 둘에게 각각 오천엔씩!!!(난 사례금으로 이미 받았기에 제외) 오오... 괜히 VIP 대접이 아니었구나.
게다가 나가시면서 카운터 정 반대 끝에 앉아있었던 여성손님 두분에게도 머리를 숙이시며 소란피워서 미안하다고,
이걸로 술값에라도 보태달라며 만엔짜리 한장을 턱.

그렇게 나가시는 어르신을 보며 옆에 있던 ㅇ상에게 한마디.

"어떻게 보냐에 따라선 산타클로스네요."

여기엔 ㅇ상도 허허허.

그나저나 사례금 봉투에 뭐라고 쓰여있는지 도저히 해독이 불가능해서 스탭들에게 물어봐도 모르겠단다.


해독불가.
그나저나 여기에 2만엔 들어있었다...


+꼬냑은 인터넷 검색결과 9,000엔에 조금 못미치는 가격대. 눈알 튀어나오게 비싼 건 아니었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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